스포츠처럼 관중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내고 나타나는 곳이 있고, 리얼리티 예능처럼 지나가는 행인들이 뜻밖의 감초 역할을 하는 장르가 있다. 이에 비해 드라마는 철저한 ‘통제의 영역’이다. 출연자의 동선 하나하나가 계산된 연출이기에 ‘보조출연’이라는 영역이 드라마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보조출연자들의 영역을 살펴보기 위해 <여왕의 꽃> 촬영 현장을 찾았다.
‘삶의 경험’으로 드라마를 꾸민다
연기자들이 열연을 펼치는 뒷 배경이 비어보이지 않도록 여백을 메워주고, 평범한 전경 샷에 시간의 경과와 심리의 변화라는 의미를 부여해주는 이들, 그들이 바로 드라마의 보조출연자들이다.
<여왕의 꽃>에서 보조출연 총괄을 맡고 있는 김주영 반장도 여느 보조출연 반장들처럼 보조출연자 출신이다. 10년 전 보조출연을 한 것을 계기로 6개월 만에 부반장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반장이 되어 드라마 현장을 누비고 있다.
그렇다면 보조출연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김 반장은 ‘삶의 경험’을 꼽았다. 예컨대 레스토랑 신을 찍는다면 와인 좀 마셔본 사람이 당연히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연기를 잘 할 수밖에 없다.
김 반장도 건설 현장, 나이트 클럽 등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기에 일찍 반장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고 한다. 본인이 반장이 된 지금은 ‘관찰’이 습관처럼 굳었다. 클럽에 가도 입구에서 어느 정도 톤으로 소리를 지르는지, 부킹할 때 손목을 어떻게 잡는지 꼼꼼히 관찰한다. 관찰은 현실 세계에 그치지 않는다.
일을 시작한 이후엔 드라마를 열심히 챙겨본다. 사람이 많은 신을 열심히 분석한다는 그는 드라마를 볼 때 연기자가 아니라 백(배경)이 보인다고 한다. 최근에 본 타사 드라마의 백화점 쇼핑 씬에서는 출연자들이 자연스럽게 쇼핑을 하
는 게 아니라 기계적으로 왕복을 하고 있어서 아쉬웠다고.
반장이기에 당연히 ‘인사가 만사’라고 할 수 있다. 김 반장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동원할 수 있는 이미지가 100명 정도 들어있다고 한다. 직업과 나이, 체형에 따라 최적의 이미지를 가진 보조 출연자들을 섭외하고, 예비로 어느 파트에건 백업할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를 1~2명 추가하는 센스를 잊지 않는다.
베테랑 보조출연자 출신으로서 어려운 신은 직접 등판하기도 한다. ‘주모를 희롱하는 무뢰한’ 같은, 지문만 봐도 만만치 않은 역들이 대표적. 택시 기사처럼 언뜻 쉬워 보이지만 타이밍을 정확히 맞춰야 하는 역도 여차하면 반장·부반장들이 나서야 하는 어려운 역할이다.
‘인연의 직업’이다 보니 고마운 얼굴들도 많다. 어떤 역을 맡겨도 잘 해내는 출연자들과는 꾸준히 연락하면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가장 고마운 이들은 역시 대사를 잘 소화하는 출연자들이다.
<여왕의 꽃> 39회 촬영장에도 어김없이 고마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산부인과 촬영 신에 의사로 등장한 보조 출연자였다. “아침에 하혈을 조금 했다고요?”라는 대사로 주연 배우들과 연기의 합을 맞추는 것은 물론, 진지한 눈빛연기까지 수월하게 하는 출연자를 보며 과연 일급 배우라는 생각까지 했다.
‘허동구’(강태오)가 일하는 식당을 가득채운 출연자들은 먹는 연기를 열심히 하며 신의 배경역할을 톡톡히 소화했다. 아무리 훌륭한 연출자와 연기자도 세상 모든 일을 겪어볼 순 없는 법. 연출자와 연기자에게 부족한 ‘삶의 경험’을 수십 명의 보조출연자들이 각자의 경험으로 메워줄 때 화면의 여백은 메워지고 드라마는 빛이 난다. 갈수록 승자독식으로 각박해져만 가는 세상, 가끔은 포커스 밖의 출연자들에게도 시선을 돌려보는 것은 어떨까.
ⓒ MBC | 이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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